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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좋더란다. 나는 온갖 농사일로 움츠러든 할머니의 얼굴만 기억할 뿐 꽤 미인이더구나. 어머니의 6형제를 보면 신빙성이 제법 있다. 나는 어머니를 미모의 희순이 언니라고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어머니가 가장 미모가 될 정도로 이모나 삼촌이 그렇게 훌륭했다. 재가를 청하는 소리도 여러 번 들었다는 데도 귓전으로도 듣지 않고 혼자 살았다.
아들 하나 변변치 않아도 6형제가 어디 가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생활을 했지만 그 후손의 쟁기는 끝내 놓지 않았다. 할머니와 나름대로 추억을 공유한 손자 손녀들도 저걸 못하게 하면 병날 수 있으니 내버려두라고 할 정도로 일만 했다. 등이 휘어도 하우스에 일하러 가서 야채를 시장에 내다 팔았다.
몇 년 전 군산 이모가 어느 날 얘기해 봤더니 뭔가 기억의 순서가 이상하다고 했다. 10년도 더 지난 일을 어제 일처럼 이야기해서 병원에 데려갔더니 치매였다. 버스가 마지막에 서는 동네에서 앞집과 옆집에 어린 아이들을 두고 새벽에는 예배를 드리고 낮에는 일하는 양반에게 치매에 걸렸다. 아이들은 깜짝 놀랐다. 집으로 안내하는 것은 불가였다. 전주 아저씨가 몇 년 전 추운 겨울에 시골집에 혼자 둘까봐 집에 몇 달만 동행하면 죽더라도 외출하지 않고 소파에만 앉아 있다가 집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그 후로는 아직 며칠째 집을 비웠다. 기억의 순서만 얽히고 인지에는 큰 문제가 없고 앞집과 옆집에 작은 할머니들이 살고 있어 일주일에 한 번씩 6남매가 차례로 방문하기로 하고 그렇게 몇 년을 지내왔다.
방문요양보호사를 불렀지만 자기 집에 드나드는 모습을 보지 못해 보호사를 괴롭히고 보호사가 오는 것을 취소해야 했다. 울면서 그만두셨다고 한다. 말없이 좋은 할머니가 그랬다니 신기했다. 자식이나 손자 손녀들에게는 여전히 짓궂게 굴지 않고 좋은 말만 하더니만 사람들에게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변함없이 1년에 한번씩 보는지 안 보는지 나와 언니를 잘 알고 있었다. 규원에겐 1만원을 건넸다.
지난 월요일에 갑자기 가족 단톡방에 할머니의 실종 소식이 전해졌다. 수요일에 큰아버지를 만나고 왔지만 목요일 오전에 집을 나갔다가 그후 돌아오지 않았다. 주말이 되어서야 6남매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손자들에게는 월요일의 일이 모두 알려졌다. 날씨가 이미 추워져 마지막 cctv에서 붙잡힌 모습 이후로는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하필이면 뚝방길로 올라갔는데 강변이라니 환장한 일이다. 월요일에 수색대가 갈대밭을 찾는다는 말에 생존소식은 기대도 하지 않게 되었다. 시신이라도 발견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당장이라도 장례식에 가게 될 줄 알고 집에서 스탠바이 하고 있었다. 목요일쯤 되면 난감한 상황이 오고 있음을 느꼈다. 못 찾을 수도 있겠다.
주말에 외갓집에 갔다. 6남매와 그 아이들 중에는 사연이 있는 아이들이 모였다. 할머니 집 앞 텃밭은 세상에 풀 한포기도 없이 예뻤다.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마대를 끌고 가는 것이었다. 추수가 끝난 논에 가서 떨어진 알갱이를 주워오곤 했어. 집 마당 한쪽에 그동안 주워 온 벼이삭이 담긴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좋은 걸 잘 골라줬네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도 나쁜 사람이 없었다. 아이들은 매주 노모를 봉양해 왔다. 우리 엄마는 6주에 한번 김해에서 전주로 가셨다. 칠순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힘겨운 상태였다. 요양원으로 데려오자는 말은 진작부터 당연히 나왔다. 하지만 할머니 정신이 너무 말똥말똥해서 지긋지긋했다. 병원에 며칠 입원만 하고 집에 가겠다고 난리를 피웠다고 한다. 군산의 이모가 더운 여름에 집으로 데려오자 며칠 뒤부터는 봇짐을 들고 현관 앞에 앉아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할머니의 영혼은 정원의 텃밭과 쟁기에 있었던 것 같다. 죽어도 요양원은 안 간다는 할머니 때문에 결국 아저씨들이 자주 얼굴을 내밀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넘게 가족이 돌아가신 할머니를 찾는 시간이 이어졌다. 주말 이틀 동안 갈대 주변의 마을을 샅샅이 뒤지며 나는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 때문이었다. 단 이틀이 지났는데도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몹시 피곤했다. 저렇게 열심인데 못 찾으면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했다.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우리 곁에 다시 깨닫는 날들이었다 나와 가족들은 불행 앞에서, 불행의 확정성 때문에 갈대 속을 헤매었다. 살아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시체라도 좋겠다는 마음으로 강변 갈대밭을 말이야. 살아있는 할머니를 기대할 수 없어 시신 찾기가 마음이 아팠다. 우리의 희망이라는 것이 시신의 발견이라니 정말 슬펐다.
일요일부터 일주일이 지나 월요일까지 돌고 아이들도 생업이 있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김해에 가지 않고 대구 고모한테 먼저 갔다고 한다. 그리고 화요일에 할머니를 찾아갔다.
가장 가까운 곳에 살다 퇴직하고 어머니를 돌보겠다며 요양보호사 자격을 준비해 할머니 실종 중에 시험을 보고 온 둘째 딸이 발견했다. 우리가 수색의 경계로 삼은 다리 근처였다. 치매 노인을 발견하는 곳은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곳이라는데 정말 그랬다. 그곳에 할머니가 계셨던 곳은 어떻게 거기까지 갈 수 있었냐는 것이었다. 막내딸이 사준 새 구두를 벗고 윗도리는 벗고 다리를 가리고 두 손을 가슴에 얹은 채 얌전히 누워 있었다고 한다. 갈대 사이 발밑에서 흔들리는 옷가지를 보고 발견했다. 옷을 벗어놓은 것은 전형적인 저체온증으로 인한 사망의 모습이었다. 손자 중에 경찰관이 있고 맞은편 부검관도 아는 사이여서 물어보니 아주 완전한 시신이었다고 한다. 강가에서 여러 동물이 있어 훼손을 걱정한 후손들에겐 다행이었다. 마지막을 발견한 둘째 삼촌에게 트라우마를 안길까 봐 걱정했지만 그것도 다행이었다. 경찰이 아니라 삼촌이 발견했다는 말을 걱정했는데 정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발견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펑펑 울었어. 왜 이렇게 끝나야 했는지 너무 슬펐다. 아이들도 옆집에 사시던 할머니도 그동안 고생한 보람 없이 이게 무슨 일이냐며 가슴 아파했다. 잘 지내왔는데 하필 이런 결말은 너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래도 다 울어버릴걸 그랬어안심했어 찾으니까 좋았어 어쩔 수 없는 일로 원망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집에서 우는 것은 모두 울어서인지 장례식에서는 잘 울지 않았다. 장례식장이 있는 곳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라 옛날에 아는 어른들을 많이 만났다. 사촌들도 모두 보았다. 먼 기억에만 존재했던 사람들을 눈으로 확인했다. 할머니의 실종과 죽음이 가족의 와해가 될까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결속의 계기가 된 느낌이었다.
외가는 그다지 가족관계가 강하지 않았다. 군산 사촌은 늘 송씨들이 차갑다고 말하곤 했다. 막상 어려운 일이 닥치니 서로 애쓰고 그런 모습에 그래도 가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갈비탕 한 그릇을 또 맛있게 먹으며 수고했다며 손자들에게 모두 10만원씩 건넸다. 아, 오랜만에 받은 용돈으로 웃겼어. 다음에 이모아저씨와 사촌들을 만나는 건 아마 전주아저씨 딸 내미결혼식이지? 소중하게 생각하는 첫 경사이고, 삼촌 결혼식이니까 많이 올 것 같다. 피를 나눴다는 데 큰 의미를 두진 않지만 그래도 가족은 꽤 좋다. 남편은 우리 친척들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사촌들이나 이모들과도 많이 친해져서 집에 와서 가족들과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즐거웠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할머니를 찾지 못했을 때였지만 쓰고 있을 때 찾아 장례를 마치고 왔다. 완결짓지 못한다는게 얼마나 가슴아픈지 알았다. 그만한 결말이 나서 감사하다. 가슴이 안 아픈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됐다. 그렇게 하면 돼.